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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증발



출처 : 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808198.html


<인간 증발>(Les ?vapor?s du Japon)은 프랑스인 저널리스트 레나 모제와 남편인 사진작가 스테판 르멜의 일본 취재기다. 취재 대상은 일상 중 홀연히 사라져버리는 사람. 이들은 이런 ‘증발’한 사람들이 세계에서 가장 많다는 일본을 찾았다. 2014년 파리에서 출간된 이 책을 쓰기 위해 그들이 일본을 취재한 기간은 약 5년. 따라서 그들이 일본 취재를 시작한 것은 2008년 세계를 뒤흔든 미국 월스트리트발 국제 금융위기 직후다. 비 내리던 어느 날 저녁 파리의 한 카페에서 일본인 아내를 둔 한 친구로부터 매년 수많은 일본인이 문득 가출해서 영영 돌아오지 않는다는 ‘이상한 현상’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그들은 그 “불가사의한 현상을 취재할 수 있다는 확신만이 유일한 나침반”인 상태로 일본으로 향했다.

체면·위신을 중시하고 사적인 비밀 같은 것을 주변 사람들에게 잘 털어놓지 않는 일본에서 이런 ‘이상한 현상’을 이만큼이나마 들여다볼 수 있었던 것은 낯선 외국인, 특히 구미인이었기에 가능하지 않았을까.

책은 이런 이야기로 시작한다. 어느 날 구니 가즈후미는 훌쩍 집을 나와 다시는 돌아가지 않았다. 당시 20대 후반 나이였던 그는 이제 60대 후반. 명문대를 나온 뒤 금융사 자산관리 업무를 맡은, 실력 있고 용모단정한 그는 한때 금융상품을 가장 잘 파는 ‘톱 셀러맨’으로 앞날이 창창했다. 잘못된 곳에 투자했다가 4억엔을 날린 그 일이 있기 전까지는. 수치심에 떨던 그는 1970년 어느 날 아침 아무런 말도 없이 무작정 열차를 타고 사라졌다. 그야말로 ‘증발’이었다.



도쿄에 사는 대학 동창 집에 숨어 몇주를 보낸 그는 어느 날 또다시 증발했다. 불법고용이 판치는 곳으로 흘러들어가 일당 8000엔의 밑바닥 일을 시작했다. 벽돌 나르기, 운전, 잠수부, 카바레 웨이터…. 그렇게 몇년간 빚쟁이들을 피해 방황하던 그는 신문을 통해 무엇이든 처리해 준다는 해결사 ‘벤리야’(便利屋) 심부름센터를 알게 됐고, 로드킬 당한 개 사체와 산업폐기물, 토막살해당한 사람 주검 등을 치워주는 회사를 차렸다. 자신처럼 혼자 또는 온 가족이 몰래 사라지는 야반도주를 감쪽같이 처리해주는 ‘이삿짐센터’도 운영했다. 실종자, 사망자로 처리된 그는 주민등록이 말소됐다. 사회보장 혜택도 말소되고 자녀들은 학교에도 다닐 수 없다. 40여년간 그는 이렇게 투명인간처럼 살아가고 있다.

사연은 천차만별이지만, 일본에선 가즈후미처럼 빚, 파산, 실직, 이혼, 시험낙방 등 실패로 인한 고통과 수치심을 견디지 못하고 증발하는 사람이 매년 10만명이나 된다. 그중 경찰에 실종 신고되는 수만 8만5000명. 부동산값이 천정부지로 치솟던 1980년대의 거품경제가 무너진 1990년대엔 그 수가 매년 12만에 달했다. 그 ‘잃어버린 10년’의 장기불황은 ‘잃어버린 20년’이 됐고, 요란한 ‘아베노믹스’ 구호가 울려퍼진 지 한참 된 지금도 여전히 전망은 불투명하다.

“사카에(조후 지역 실종자가족지원협회장)가 보기에 일본 열도는 ‘압력솥’ 같다고 했다. 일본인들은 마치 약한 불 위에 올라간 압력솥 같은 사회에서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 그러나 압력을 견딜 수 없을 정도가 되면 수증기처럼 증발해버린다. 증발 문제는 터부시되고 있지만, 연간 자살자 수 3만3000명, 즉 매일 집계되는 자살자 수가 90명에 이른다는 말이다.”

이 대목에서 자살률 세계 최고라는 우리 사회를 겹쳐 생각하게 된다. 한국은 지구상에서 일본과 가장 닮은 나라일 것이다. 게다가 일본 증발자들 중 상당수가 일본에서 여전히 존재하는 불가촉천민 계급인 ‘부락민’ 출신이고 그 부락민 또는 그와 같은 최하층 빈민들을 재일 조선인 같은 소수자(마이너리티)들이 채우고 있다.
피와 주검을 다루는 정육점·장의사 등 ‘더러운 일’을 하는 부락민이 더 많이 증발하는 이유? “은행이 대출을 거부하기 때문에 야쿠자가 운영하는 (이자가 훨씬 비싼) 사채 회사에서 돈을 빌린 부락민들이 많아. 지긋지긋한 가난을 탈출하기 위해 야쿠자 일원이 되는 부락민도 있지.” 일본인들은 이런 차별에 대해 아무 얘기도 하지 않지만, 재일 조선인, 브라질계 일본인 등 소수민족들은 이런 차별을 강하게 느낀다고 한다고 쓴 뒤, 레나 모제는 일본 우익들이 외치는 다음과 같은 “섬뜩한 슬로건”을 인용한다. “조선인을 죽여라!” “조선인들은 목을 매달아라, 독을 마셔라, 죽어라…!”

저자들은 금융 및 부동산 투기 실패자, 대출 및 사채의 그물에 사로잡힌 자, 실직자, 회사 프로젝트 탈락자, 보증 섰다 부도난 자, 도주 살인범, 그래서 증발한 사람들을 등쳐먹고 돕기도 하는 야쿠자들을 물어물어 찾아가 만났다. 적은 인력으로 최대한 빠르게 좋은 아이디어와 제품을 경쟁적으로 만들어내야 하고, 버티지 못하는 노동자들은 떠나거나 미쳐버리거나 병들거나 자살을 하는 세계 최대 자동차회사의 본거지 도요타시에서 증발한 이들을 만났다. ‘지옥의 캠프’, ‘두뇌 세탁소’라는 임직원재교육학교도 취재했다. 2002년에 홀연히 사라진 20대 자식(회사원)이 북한에 납치당했다고 (아무 근거도 없이) 믿어 의심치 않는 가족 얘기도 나온다. 그리고 일본 정부 발표보다 훨씬 더 높은 방사능 측정치를 보이는 후쿠시마 원전사고 현장에 방치된 일꾼들, 노인들, 노숙자들, 가출자들과 그들을 이용해 돈을 버는 야쿠자들과 그런 야쿠자들을 이용하는 부정부패 고리도.


또 이런 가슴 시린 얘기도. “사랑해요, 아야에. 늘 사랑했지만 차마 말을 할 수 없었습니다. 당신은 너무 아름다웠습니다. 하지만 나는 정육점집 아들이라서…. 당신에게 다가가고 싶어서 남편 에이키를 고용한 겁니다.” 아야에와 남편 에이키, 아야에를 사랑한 정육점 주인 히로시는 어릴 때부터 알던 사이로 학교도 함께 다녔다. 어른이 된 뒤 남편이 다니던 정육점집 주인 히로시가 아야에에게 접근했고 원래 그를 좋아했던 아야에는 그것을 즐겼으나 협소한 체면사회 속에서 불안감과 죄책감에 시달리다 가출해 도쿄 유흥가 가부키초의 홀 서빙 직원이 됐다. 야쿠자 주인의 주선으로 조그만 야간업소 주인이 돼 불륜관계를 맺은 단골손님 덕에 조그만 식료품 가게까지 차렸으나 자신이 부락민 출신이라는 것을 늘 숨겨야 했다. 15년 만에야 버리고 온 아들에게 전화해서 알았다. 남편은 교통사고로 죽었고, 정육점 주인 히로시도 에이키와 아야에에게 자신의 가게를 물려준다는 유서를 남기고 자살했다.



미래가 창창한 금융맨이었던 가즈후미. 회사에서 최고 실적을 올리던 그였지만 한순간 잘못된 투자로 4억 엔을 고스란히 날렸다. 1970년 어느 날 아침, 가즈후미는 '증발'했다. 가명으로 몇 년간 도주 생활을 이어가던 그는 서른여덟의 나이에 창업을 한다. 회사 간판은 '무엇이든 처리해 드립니다'. 처음 맡은 일은 로드킬을 당한 동물 사체를 치우는 일이었다. 익사하거나 토막 살해당한 시신 처리까지. 음지의 사업을 이어오던 그는 산 사람을 음지의 세계로 옮기는 일로 사업을 확장한다. 자신처럼 '야반도주'하려는 이를 돕는 일이다. 어두컴컴한 새벽, 검은색 담요와 커튼을 들고 나타난 직원들은 재빨리 창문을 가리고 가구를 포장한다. 가능한 한 은밀하게 최대한 재빠르게 작업하는 게 사업의 생명이다.

경기 침체에 파산·실직 등으로 
버거운 현실 견디지 못한 일본인 
매년 10만 명 증발하듯 사라져 

대부분 사망자·실종자 처리 
음지서 일용직 일로 근근이 연명 

프랑스인 저널리스트 부부 
도쿄·오사카 등지 돌며 취재 
우리 사회 안전망 되돌아보게 해

1989년 도쿄 주식 급락으로 일본은 '잃어버린 10년'의 늪에 빠진다. 부동산 가격 폭락, 경기 침체, 디플레이션으로 50만 명 이상이 빚을 갚을 수 없는 상황에 놓였다. 이들의 선택은 스스로 목숨을 끊어 세상을 뜨거나, 증발하듯 안 보이는 곳으로 사라져 숨죽인 채 살아가는 것이었다. 매년 10만 명의 일본인이 이런 방식으로 증발했다. 파산, 이혼, 실직 등 각자 삶의 실패를 감당할 수 없는 이들은 '자발적 실종'을 택했다. 1990년대 중반에는 야반도주하는 이의 수가 12만 명을 기록하며 정점을 찍었다. 2008년 금융위기로 또 한 번 급증하는 등 일본인들의 증발 현상은 현재 진행형이다.

프랑스의 저널리스트 레나 모제와 사진가 스테판 르멜. 이들 부부는 2008년 우연히 증발하는 일본인들에 대한 이야기를 접한 뒤 탐사에 나섰다. <인간증발>은 5년간 도쿄, 오사카, 후쿠시마 등 곳곳을 돌아다니며 증발한 사람들을 만나 기록한 결과물이다.




출처: http://news20.busan.com/controller/newsController.jsp?newsId=20170824000183 
 

현실을 등지고자 한 이들이 숨어든 곳은 대도시다. 익명의 삶을 살기엔 한적한 시골보다 숨 가쁘게 바쁜 도시가 더 적합하다. 지도에도 없는 도쿄의 '산야', 오사카의 '가마가사키'는 이름 없이 살아가는 이들이 밀집한 지역이다. 이곳에서 프랑스인 부부는 가슴 먹먹한 이야기들을 길어 올린다. 

모텔 종업원인 유이치는 어머니의 병원비를 감당할 수 없어 병든 어머니를 값싼 모텔에 버리고 도망쳤다. 20대 청년 마사오는 입시에 실패하고 교도소를 다녀온 뒤 쪽방에서 살며 가족·세상과의 연을 끊었다.


 

저자들은 이들의 이야기를 세상에서 '증발'한 것이라 묘사한다. 서서히 끓어오르는 압력솥처럼 버거운 현실의 압력을 견디다 한계에 다다르면 수증기가 터져 나오듯 증발해 버리는 것이다. 가즈후미처럼 도주자를 돕는 일을 하는 이들도 있고, 도주자를 찾아주는 사립 탐정도 생겨났다.

현실에서 증발했다곤 하지만 '과거'만 지워 버렸을 뿐, 여전히 이들은 '현재'의 또 다른 현실에서 고통받고 있다. 사망자로 처리되거나 실종자로 분류된 탓에 아무런 사회보장 혜택을 받지 못한다. 일용직 일로 연명할 수 있으면 그나마 다행이지만 또 다른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후쿠시마 원전 폭발 사고 이후 원전쓰레기를 수거하는 일용직 노동자들 대부분이 이런 사람들이다. 한두 달 동안 숙식을 제공해 준다는 제안에 피폭 따윈 아랑곳없이 '죽음의 땅'으로 흘러 들어간다. 어차피 돌아오지 않는다 해도 찾는 이가 없다.


 

이방인 부부가 끈질긴 탐사를 통해 드러낸 일본 사회의 민낯은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도쿄의 산야처럼 지도에서 지워 버린, 사회적 관심에서 소외된 지역은 없는지 돌아보게 된다. 사회적 약자를 위한 안전망. 끓어오르는 솥의 압력을 낮추는 일이 왜 중요한지, 일본의 증발자들은 말하고 있다.